에르빈 폰 라호우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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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르빈 폰 라호우젠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군인이자 정보 장교였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방첩대에서 활동하다가, 1938년 안슐루스 이후 독일 아프베어에 합류하여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과 함께 반나치 활동을 했다. 라호우젠은 아프베어 제2부 책임자로 임명되어 파괴 공작을 담당했으며, 폴란드 침공 당시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했다. 이후 동부 전선에서 복무하며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었고, 7·20 사건 이후에도 전선 복무로 체포를 피했다. 전쟁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증언하며, 헤르만 괴링을 포함한 피고인들의 범죄 행위를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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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빈 폰 라호우젠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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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정보 | |
출생 | 1897년 10월 25일, 빈 |
사망 | 1955년 2월 24일 (향년 57세), 인스브루크 |
국적 | 오스트리아 |
군사 경력 | |
복무 기간 | 1915년 ~ 1945년 |
소속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오스트리아 연방군 독일 국방군 |
최종 계급 | 소장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추가 정보 | |
소속 부대 | 아프베어 |
훈장 | 1914년 철십자 훈장 2급 1939년 철십자 훈장 1급 및 2급 전공 십자 훈장 오스트리아 군사 훈장 3급 명예 십자 훈장 전쟁 공로 십자 훈장 2급 |
2. 제1차 세계 대전과 전간기
라호우젠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서 복무했고, 전쟁 후 오스트리아 방첩대의 일원이 되었다. 1938년 안슐루스 이후 오스트리아 정보 기관이 독일로 흡수되면서,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이 이끌던 아프베어에 합류했다.[1]
2. 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복무
라호우젠은 귀족 가문 출신의 오스트리아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서 복무했다.[1] 전쟁 후에는 오스트리아 방첩대에서 활동했다.[1] 1938년 안슐루스 이후 오스트리아 정보 기관이 독일로 흡수되면서, 라호우젠은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이 이끌던 아프베어에 합류했다.[1]2. 2. 오스트리아 방첩대 활동
라호우젠은 오스트리아 귀족 가문 출신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서 복무했다.[1] 전쟁 후 오스트리아 방첩대의 일원이 되었다.[1] 1938년 안슐루스 이후 오스트리아 정보 기관은 독일로 흡수되었고, 라호우젠은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이 수장으로 있던 아프베어에 합류했다.[1]3. 제2차 세계 대전
라호우젠은 빌헬름 카나리스와 함께 반나치 성향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는 히틀러에 반대하는 정보국 내 비밀 조직의 일원이었다. 카나리스는 라호우젠을 아프베어 제2부 책임자로 임명하여 브란덴부르크 부대와 파괴 공작을 담당하게 했다.[2][3]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에서 라호우젠은 성공적인 파괴 공작을 수행했다. 그러나 카나리스는 첩보 활동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라호우젠은 영국으로 파견될 요원들에게 첩보 훈련을 주로 시켰고, 이는 참담한 실패로 이어졌다. 1942년 6월, 오퍼레이션 파스토리우스에서 미국에 상륙한 파괴 공작원들은 배신으로 인해 FBI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4]
1943년, 라호우젠은 동부 전선으로 보내졌다. 그는 파비안 폰 슐라브렌도르프가 실행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오퍼레이션 스파크, 1943년 3월 13일)에 사용된 폭탄을 제공했다고 주장했지만, 암살은 실패했다. 7·20 사건 이후,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와 카나리스를 포함한 수천 명이 처형되었지만, 라호우젠은 전선 복무 덕분에 처형을 피했다. 1944년 7월 19일, 라호우젠은 포격으로 심한 부상을 입었다.
3. 1. 아프베어 활동 초기
오스트리아 귀족 가문 출신인 라호우젠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서 복무했다. 전쟁 후 그는 오스트리아 방첩대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1938년 안슐루스 이후 오스트리아의 정보 기관은 독일로 흡수되었고, 라호우젠은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이 수장으로 있던 아프베어에 합류했다.[2]라호우젠과 카나리스는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는데, 둘 다 반나치 감정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라호우젠은 히틀러에 반대하는 정보국 운영 장교들의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카나리스는 그를 아프베어 제2부의 책임자로 임명했는데, 이 부서는 주로 브란덴부르크 부대와 파괴 공작을 담당했다.[2][3]
3. 2. 주요 작전
라호우젠은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 당시 성공적인 파괴 공작을 수행했다.[2][3] 그러나 카나리스는 파괴 공작보다 첩보 활동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라호우젠은 영국으로 파견될 요원들이 주로 첩보 활동을 위해 훈련받도록 명령했고, 이는 참담한 실패로 이어졌다. 1942년 6월 오퍼레이션 파스토리우스 동안 미국에 상륙한 파괴 공작원들은 배신으로 인해 FBI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4]1943년, 라호우젠은 동부 전선으로 보내졌다.[2] 그는 파비안 폰 슐라브렌도르프가 실행한 히틀러 암살 시도(오퍼레이션 스파크, 1943년 3월 13일)에 사용된 폭탄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암살 시도는 실패했다. 7·20 사건 이후,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와 카나리스를 포함한 수천 명이 처형되었지만, 라호우젠은 전선 복무 덕분에 처형을 피했다. 1944년 7월 19일, 라호우젠은 포격으로 심하게 부상을 입었다.
3. 3. 동부 전선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라호우젠은 카나리스와 함께 둘 다 반나치 감정을 공유했기 때문에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다. 라호우젠은 히틀러에 반대하는 정보국을 운영하는 엄선된 장교들 모임의 일원이었다. 카나리스는 그를 아프베어 제2부의 책임자로 임명했는데, 이 부서는 주로 브란덴부르크 부대와 파괴 공작을 담당했다.[2][3]라호우젠은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의 성공적인 파괴 공작을 처리했다. 그러나 카나리스는 파괴 공작을 첩보만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라호우젠은 영국으로 파견될 요원들이 주로 첩보 활동을 위해 훈련받도록 명령했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1942년 6월 오퍼레이션 파스토리우스 동안 미국에 상륙한 파괴 공작원들은 그들 중 한 명의 배신으로 FBI에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되었다.[4]
1943년, 라호우젠은 동부 전선으로 보내졌고, 따라서 카나리스와 함께 불신을 받게 된 아프베어의 마지막 날들을 벗어났다.[2] 라호우젠은 나중에 자신이 스몰렌스크 음모(오퍼레이션 스파크, 1943년 3월 13일)에 사용된 폭탄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파비안 폰 슐라브렌도르프가 실행한 암살 시도는 실패했다.
암살 시도와 쿠데타(7·20 사건)의 실패 이후,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와 카나리스를 포함한 수천 명의 공모 혐의자들이 처형되었다. 라호우젠은 전선에서의 복무 덕분에 주목을 피했다. 1944년 7월 19일 라호우젠은 포격으로 심하게 부상을 입었다.
4.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전쟁이 끝난 후, 라호우젠은 1945년부터 1946년까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21명의 피고인에 대해 자발적으로 증언했다. 라호우젠은 검찰 측 첫 번째 증인이었으며, '압베어 저항'의 유일한 생존자였기 때문에 주목받았다.[2] 그는 수십만 명의 소련 포로 살해와 Einsatzgruppen(이동학살집단)의 학살에 대해 증언했는데, 이들은 소련, 폴란드, 우크라이나 점령지에서 1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살해했다.
참조
[1]
서적
Generalmajor Erwin Lahousen-Edler von Vivremont. Ein Linzer Abwehroffizier im militärischen Widerstand
LIT-Verlag, Münster
2005
[2]
웹사이트
Harry Carl Schaub, Books (J-Z) with abstract on the German Resistance to Hitler.
http://intellit.musk[...]
2010-03-22
[3]
문서
A World at War (book excerpt).
http://www.oslaw.com[...]
2010-03-22
[4]
서적
Betrayal: The True Story of J. Edgar Hoover and the Nazi Saboteurs Captured During WWII
Hippocrene Books, Inc.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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